(합천)실천궁행을 보여주는 합천사람 정인홍,남명조식,그리고 김굉필

 

- 일시: 2023-8-5~6
- 날씨: 후덥지근하고 더운 날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음
- 몇명: 홀로
- 폭서대비용품: 쿨링시트,에어콘 가스 보강,팔 토시,챙 넓은 모자,다이소 차량선풍기

 

합천사람 정인홍(1535~1623)은 합천 사람 남명조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남명조식(1501~1572)은 경의로 대변되는 실천에 방점이 찍혀있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그의 제자들의 많은 인원이 의병장이 되었습니다.과연 남명조식은 누구로 부터 영향을 받았을까요?  아마도 합천에서 처가살이한 김굉필(1454~1504)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봅니다.소학의 "실천"이라는 큰 흐름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실천궁행(實踐躬行)은 실제로 밟고 몸소 행한다는 뜻으로,말로 약속을 맺거나 계획을 세우는데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하고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은 선조(宣祖) 초기에 유일(遺逸)로 출사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곧은 명성을 크게 떨친 바 있고, 임진왜란 때는 남명학파의 리더로서 동문과 수하의 문인들을 대거 기의(起義)케 하여 경상우도 지역을 보전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끝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宣祖)의 지우를 입어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기도 하였고, 광해군(光海君)의 지우를 입어 1609년 광해군 원년부터 1623년 인조(仁祖)가 정권을 차지할 때까지 한 번도 현직에 나아가 업무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사헌으로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의 고관(高官) 현직(顯職)을 왕이 거두어들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비록 인조반정 후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 이후 약 300년 가까이 집권 세력들이 끊임없이 그의 못된 점을 드러내려 하였지만, 그의 꼿꼿한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언행과 그를 추종한 수많은 문인 집단이 해내었던 의병활동 등을 모두 가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광해군 시대의 의미와 정인홍의 정치적 역할 및 그 학자적 위상에 대해 의미있게 해석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 답사일정(風輪) :354km

 

합천 청량사-정인홍 묘(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647)-가남정-합천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소학당-육우당-합천 묵와고가

 

 

2023-8-5

 

청량사로 올라가는 길이 좁습니다.교행이 어려운 도로사정이고 경사도마저 가파릅니다.다행히 토요일 늦은밤시간이라 교행하는 차량이 없어서 청량사 아래 대형버스가 주차하는 곳에서 일박합니다.주차공간은 다른분들이 댄 차가 없어서 홀로 넓게 사용했습니다.

 

 

2023-8~6

 

▷합천 청량사

 

매화산 남산제일봉 등산로에 자리한 청량사는 매화산의 또 다른 이름인 천불산으로 되어 있습니다.올라오는 길에 "곰출현" 플랭카드가 있어서 한번 더 주위를 살펴보게 됩니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니 아주 튼튼해보이는 축대 아래 연약한 봉숭아가 잘 어우러져 보기 좋습니다. 

대웅전 앞에 서니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대웅전 안의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모두 보물입니다.우선 보물 266호인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위에 삼층의 석탑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석탑입니다.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고 청량사는 최치원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합니다.무엇보다 대웅전 뒤의 천불산의 화강암 바위들이 정말 천분의 부처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대웅전의 문이 열려있어서 보물 제 265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에 먼저 합장하고 눈치보지 않고 사진을 찍습니다. 삼단의 사각형 대좌위에 항마촉지인의 결과부좌하였고 착의는 우견편단입니다.나발의 머리는 육계가 뚜렷하고 단아한 얼굴표정과 신체형태는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석굴암 불상이 떠오릅니다.광배꼭대기에는 화불이 모셔져 있고 두쌍의 비천상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석불의 기단석에 보이는 차공양을 하는 보살상이 조각돼있어 신라시대에도 차문화가 발달 돼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물 제 253호인 청량사 석등을 자세히 보면 네모난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팔각으로 운상누각이 교대로 새겨져 있습니다.복련석에는 반전한 귀꽃이 있으며 간석은 고동형으로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하였습니다.화사석은 팔각으로 네면에는 화창이 있고 나머지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이고 상륜은 일부부재가 올려져 있지만 원형을 상실하여 아쉽습니다.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으로 9세기경으로 추측됩니다.전체적으로 균형과 안정감이 돋보입니다.

사찰 당우 뒤로 파도치듯 몰려오는 가야산 산세들이 볼만합니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설영루(雪影樓)를 통해 대웅전으로 나아가면 석등과 탑이 보입니다. 

능소화도 예쁘게 피었습니다.

▷정인홍 묘(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647)

소년기의 정인홍은 비범하였습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그가 소년기에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정인홍이 11세 때 산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고, 그때 마침 그 도의 감사가 당도하여, 밤에 글 외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더니 바로 정인홍이었습니다. 도사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데려다가 묻기를 "네 시를 잘 짓느냐?"고 묻자, 정인홍은 겸손해하면서 잘 짓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감사가 탑 근처 왜송(倭松)을 글제로 내고 운자를 불러주며 짓게 하였더니, 정인홍은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그는 당시 감사 또는 판결사이던 양희가 왜송을 주제로 내고 시를 지으라 하니 바로 시를 지었다 합니다.

왜송 (矮松)


짧고 짧은 외로운 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 短短孤松在塔西(단단고송재탑서)
탑은 높고 솔은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 塔高松下不相齊(탑고송하불상제)
오늘날 외로운 솔이 짧다고 말을 마소 / 莫言今日孤松短(막언금일고송단)
솔이 자란 다음 날에 탑이 도리어 짧으리 / 松長他時塔反低(송장타시탑반저)

 

(필사)

합천 정인홍 묘는 남명조식의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의 묘입니다.남명조식의 출생지와 사망지 모두 합천 삼가현(현재는 합천군 삼가면)으로 나오니 정인홍과 남명 조식 모두 합천사람입니다.정인홍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에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입니다.조선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기에 북인의 정치적,학문적 수장으로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정인홍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광해군 15년에 역적으로 처향당했기 때문에 그의 묘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였습니다.고종 1년에 와서야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으며 순종2년에 복권되었습니다.묘 앞에 세워진 석물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 조성된 것입니다.

 

정인홍은 남명학파이자 조식의 적통 제자로 조식이 말년에 자신의 보물인 경의검을 물려준 인물입니다.강직하고 배타적인 인물로 유명합니다.워낙 강직하다보니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인과 남인을 손잡게 만들어 인조반정의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봅니다.정인홍은 그 당시 비주류였던 남명선생을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역풍을 맞았고 정승을 했고 나이가 88세인데도 불구하고 참수형을 당한 인물입니다.의병장으로서 큰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공으로 돌리는 것에는 무심하여 크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투가 치열했던 경상도 지역의 의병장으로 경상도의 모든 의병들은 정인홍의 지휘 아래에 있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높았습니다.전재산을 바쳐 의병을 지원하였고 아들 정연이 전쟁도중 병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595년 조선 조정에서 일본측과 화의(和議)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등 국론이 분열되자 정인홍은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다가 이를 듣고, 주화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지은 '과무계(過茂溪)'라는 시를 지어 이들을 질타하였습니다.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 於今誰唱和戎說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 將士當年枉死亡"

 

(필사)

 

정인홍은 영남지역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고령,합천 등지를 방어했으며 무계전투,초계전투,안언역전투,성주성전투 등에서 승전을 거두었습니다."난중잡록"에 의하면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아 그의 공로는 남보다 못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 하였습니다.

 

 

 

▷가남정

 

합천 가남정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정인기,금월헌 정인함,우천 정인휘,낙제 정인지 4형제믈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사우정이라고 불립니다.이들 4형제는 4촌 형제인 의병대장 정인홍을 도와 의병 활동에 참여했습니다.4형제는 영조14년 우계리의 세덕사에 그들의 시조와 함께 모셔졌고 이후 세덕사는 철종 13년에 운계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운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919년에 다시 가남정으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남정 앞에는 금월헌 정인함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가남정 앞에는 정인함이 손수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400살 이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합천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이지만 두 석탑의 크기나 양식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조형적인 부분에서는 약간 차이가 납니다.

▷소학당

소학당 뒤의 숲이 참 좋습니다.흡사 방풍림 역할도 했을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숲이 잘 가꿔져 있어서 소학당의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다만 주위가 농촌의 생활 모습들이 산만하여 잘 관리되지 못한 인상을 받았습니다.소학당은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과 더불어 학문을 닦던 유서 깊은 곳으로 김굉필을 사위로 얻은 어모장군 박예손이 그를 위해 지어주었으며 한훤당은 바로 서재의 이름이었습니다.한훤당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의 학자로 소학의 실천을 통해 도학의 정신의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소학(小學)은 송대 주희가 8세 내외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수신서입니다.그래서 소학은 쉬울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소학에 나오는 어려운 한자도 많고 소학은 무엇보다 실천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후 남명조식의 경의사상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김굉필은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습니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오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 김굉필 

김굉필은 자신의 스승인 김종직과 결별합니다.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등용된 뒤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이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때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중직에 임용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건의 하나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완곡하게 비판했습니다.

 

도(道)라는 것은 겨울엔 갖옷 입고 여름엔 얼음 마시는 것인데 /

날 개면 가고 비 오면 그치는 것을 어찌 전능(全能)이라 하겠는가 /

난초도 속된 것을 좇아 결국 변한다면 /

어느 누가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신랄하게 풍자한 제자의 시에 심기가 불편해진 김종직은 이에 화답하는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내면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내비치면서 자신의 처세가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

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

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이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 조롱하지만 /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네.

 

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습니다.

소학당 대문 좌측의 감나무가 아주 큽니다.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에 보면 지동암(志同巖)이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학문의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겠죠. 뒤쪽으로 산들이 위엄있게 두르고 있고 소학당 좌측으로 물길이 흐르는데 지동암이라는 큰 바위가 물길을 보호합니다.

산수동거의 형국이라 좋지 않은 배치이지만 500년 수령의 우람한 느티나무 세그루가 비보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동방오현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입니다.

 

▷육우당

 

육우당은 파평윤씨의 종손인 윤석우가 세운 가문의 재실로 묵와 윤우의 아들인 윤병구,윤병래,윤병은,윤병주,윤병효,윤명민 여섯 형제의 우애를 기르기 위해 세워졌습니다.육우당 글씨 앞에는 돈목재가 보이고 우측엔 정양헌이 보입니다.

▷합천 묵와고가

조선 선조때 선전관을 지낸 묵와 윤사성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윤사성의 10대손이자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인 만송 윤중수의 생가이기도 합니다.문이 잠겨 들어가보지 못하고 아주 큰 모과 나무 한그루가 담장 위로 보입니다.모과가 아직도 많이 열려 있습니다. 

 

 

다소 유연했던 곽재우에 비하면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성정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그런 이유로 조선 최고령 참수형을 당했습니다.정인홍이 처형되자 정인홍의 문도들은 비분강개하여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이로 인행 합천 등 여러고을에는 벼슬하는 사람이 끊어졌다고 합니다.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정인홍의 국난극복을 위한 우국충정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이순신,최영과 함께 정인홍을 우리나라 4대 영웅으로 평가 하기도 하였습니다.

 

━━━━━━━━━━━━━━━━━━━━━━━━━━━━━━━━━

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 Recent posts